
U자형 설계로 환한 외부 계단을 구현한 허은순 씨의 집 ‘창조공간’.
집을 짓고 싶어 하는 사람이 무척 늘어났다. 그러나 보통 사람에게 집 짓는 일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집 지으면 10년은 늙는다는 말에 지레 겁도 난다. ‘골치 아파, 에라 모르겠다’ 아무 생각 없이 집 장수에게 맡겨버리는 사람, ‘사람들이 알게 뭐야’ 대충 짓고 나서 팔아버리고 떠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먹고 입고 쓰는 것은 하나하나 깐깐하고 까다롭게 고르면서 수억 원이 넘는 집을 짓는 문제는 그렇게 쉽게 집 장수에게 맡겨버리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집 짓기 전에 다시 한 번 숨 고르기를 해야 하는 까닭이다.
집을 지어야겠다고 마음먹은 뒤 공부하려고 시내 서점에 나갔다. 건축 관련 책들을 찾아보니 건축가가 쓴 글은 딱딱해서 쉽게 읽히지 않고, 건축에 대한 철학은 있으나 내 집을 지을 때 써먹을 수 있는 실질적 정보는 없었다. 집과 공간에 대한 이해가 우선해야 제대로 된 건축이 가능하지만, 쳐다보기만 할 집이 아닌, 그 안에 들어가 살 집을 지어야 할 건축주에게는 건축에 관한 철학을 구체적으로 현실화하는 방법도 필요한데 말이다. 아무것도 모르던 새댁 시절, 요리할 때 친정엄마가 옆에서 시범을 보여주면 얼마나 든든했는가! 집 짓는 것도 누가 옆에서 조목조목 쉽게 가르쳐주면 얼마나 좋을까?
동네 풍경에 보탬이 되는 집
우리 동네는 내가 이사 온 2007년과 견주어보면 참 많이 달라졌다. 이 동네는 서울에서도 유명한 단독 주택 주거 단지였다. 큰 집이 많고 공원이 코앞에 있어 부자들이 살던 동네였단다. 꽃이 흐드러지게 핀 마당이 있는 집들, 집집마다 큰 나무들이 있어서 동네를 걷는 것이 참 즐거웠다. 그런데 재건축 바람이 불면서 크고작은 단독 주택들이 헐리고 다가구나 다세대 주택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섰다. 집장수들이 동네를 휩쓸고 지나간 지금, 동네 풍경은 이루 말할 수 없게 변해버렸다. 동네가 미워지면서 큰 집에 살던 사람들은 집을 팔고 떠나버렸다.
만약 이 동네에 재건축 바람이 불기 전에 건축가에게 집을 맡길 생각을 했더라면 오히려 전보다 더 멋진 동네가 되었을 텐데, 이 동네의 좋은 점을 살리지 못하고 어수선해진 동네를 볼 때마다 너무나 안타깝다. 나와 남편은 이 동네를 무척 좋아했다. 집을 짓기 전에 남편과 나는 더 이상 이 동네가 망가지면 안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짓지 말자고. 우리와 한집에 사는 이웃들에게 욕먹을 짓은 하지 말자고. 건축에 대한 거창한 철학은 없었지만, 우리 생각은 단순하고 소박했다. 아무렇게나 짓지 말자, 작은 집에 살아야 하는 형편인 사람에게도 제대로 된 집을 지어주자,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단순한 생각을 실현하기까지는 산 넘어 산, 물 건너 물이었다.

신축 전 집의 모습.

네모 반듯한 능동 주택가에 자리한 ‘창조공간’의 완공 모습.
조금 다른 설계는 없을까?
빌라를 포함해 우리나라의 다가구나 다세대 주택은 대부분 네모난 외관에 내부 계단을 두었고, 좁은 복도 양쪽으로 현관문이 있다. 내가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이 부분이었다.집 입구가 주차장 안에 있고, 어두컴컴한 계단과 복도를 지나서 집에 들어가야 하는 구조. 단독 주택에 오래 산 내게는 대문 없이 필로티 구조로 이루어진 다세대 주택이 너무나 볼품없어 보였다. 작은 집에 살더라도 좀 더 햇빛을 받을 수는 없을까?
대문을 지나 한숨 돌린 뒤에 내 집으로 들어가는 여유를 부릴 수는 없을까?그러나 우리 땅에 맞춰 건축업자들이 뽑아온 가설계도는 하나같이 비슷비슷했다. 남북으로 기다랗고 네모난 집, 세대 수의 반은 북향집으로 만든 구조. 1층은 필로티로 해서 주차장을 만들고, 2ㆍ3층은 가운데 복도를 넣고 양쪽으로 방 두 개짜리나 세 개짜리 집을 그냥 잘라서 앉혀놓았을 뿐이었다. 다른 방법이 없냐고 물으면, 하나같이 우리 집 땅이 못나서 다른 방법은 없단다. 구획 정리가 잘된 동네에 있는 반듯한 직사각형 땅, 그것도 삼거리에 있어서 앞이 터져 있는데 ‘못난 땅’이라니 이해할 수 없었다. 집을 짓기 전까지는 모르던 것이다.
땅에도 종류가 있다는 것을. 우리 집은 1종주거 지역이라 4층까지밖에는 지을 수가 없는 땅이었다. 땅이 2종만 되었어도 5층까지 올라갈 수 있는데, 그럴 수 없었다. 게다가 땅값이 너무 비싸 집 장수들이 땅을 사서 짓기에는 수지가 맞지 않았다. 더구나 건축업자들이 못난 땅이라고 하는 까닭은 길이 북쪽이 아닌 남쪽으로 나 있기 때문이었다. 남쪽으로 길이 난 땅은 일조권 사선 제한 때문에 북쪽으로 길이 난 땅보다 불리하다. 게다가 동서로 긴 땅이 아니라 남북으로 긴 땅이라 더 불리했다. 네모반듯한 땅을 못난 땅이라고 하는 까닭을 그제야 안 것이다. 집 장수의 논리대로라면 수지가 안 맞는 땅이라 하더라도, 이런 설계도대로는 집을 지을 수 없어서 이렇게 물었다.

(왼쪽)집 장수들이 뽑아온 가설계도 중 하나 (오른쪽)나카에 유지 씨의 설계도
“유리 천장을 만들어서 입구와 계단까지 빛이 환하게 들어오도록 할 수는 없나요?” “북향집을 없애고, 충분한 햇볕과 바람을 받아들이도록 할 수는 없나요?” 건축업자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심지어 어느 업자는 이렇게 말하기까지 했다.“이 집은 대한민국 그 누가 와도 똑같은 설계가 나올 수밖에없는 땅이에요. 답이 없어요. 그러니까 수익률을 어떻게 높일지만 생각하시면 돼요.”대한민국 그 누가 와도 똑같은 설계가 나올 수밖에 없는 집이라는 말에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수익률에 초점을 맞춰 닭장 같은 집을 지을 생각은 없었다. 내가 살고 싶지 않은 집에 다른 사람들을 넣어놓고 돈을 받아 챙기는 건 내게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ㄱ 사장님은 내가 남들과 다른 집을 짓기를 원하는 걸 알고는 만남을 거듭할수록 이건 이래서 돈이 많이 들고, 저건 저래서 돈이 많이 드니 건축비를 올려달라 했고, ㄴ 사장님은 동시에 10여 채를 짓는 중이라 선뜻 맡길 수가 없었다. 집 하나를 지어도 관리 감독을 잘 못하면 부실해질 텐데, 동시에 여러 집을 짓는데 유독 우리 집만 신경 써주길 기대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니까. 집에 대해 이야기를 거듭하던 어느 날, ㄴ 사장님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쪽 일에 소질이 있으신 것 같은데, 직접 지어보시죠. 잘하실 것 같아요.” 얼굴 보고 얘기하는 자리라 이렇게 점잖게 했겠지만, 사실 내게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었을 것이다. “네가 그렇게 잘 알면 직접 해!
업자’가 아닌 ‘파트너’를 만나다
그 뒤로 나는 건축가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지명도가 있는 사람은 나 같은 아줌마를 만나줄 시간이 없고, 만나주겠다는 곳은 적잖은 상담비를 요구하기 까지 했다. “우리 회사에 건축을 맡길지 안 맡길지도 모르는데 무료로 상담할 수는 없죠.”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또 당연한 일이다. 모든 노동에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남의 시간과 노력을 날로 먹을 수는 없으니까. 무슨 상을 받았다는 건축가 사무실에 전화하니, “사실 우리는 소형 주택 설계가 전문이 아니다”라고 하고, 특별한 시도를 하는 곳이다 싶어 살펴보면, 건축하기 시작하면 건축주는 일절 관여하지 말고 건축가에게 맡길 것을 주문한다. 험산준곡에서 길을 찾지 못한 나는 집 짓기를 포기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현재 우리 집을 총괄 진행한 이종선 본부장을 만났다(그때는 회사 이름이 ‘도시건축’이었는데, 우리 집 이름 ‘창조공간’으로 회사 이름을 바꾸었다. 그 정도로 심혈을 기울인 프로젝트다). 이종선 본부장은 나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일본인 건축가 나카에 유지씨를 만나볼 것을 권했다. 서로 집에 대한 생각이 독특한 사람들이라 얘기가 잘 통할 거라나? 나중에 조사해보니 나카에 유지 씨는 꽤 유명한, 그것도 못난 땅에 독특한 디자인을 하고 특정인이 살도록 설계하는 데는 감각이 탁월한 건축가였다.

곡선 설계가 인상적인 창조공간의 내부 모습.
자투리 땅에 모터사이클족을 위해 지은 NE 아파트먼트, 소음이 발생하는 작 업을 하는 이들이 모여 사는 기찻길 옆 MM 아파트먼트… .반전이 있는 건축 가라고나 할까? 그렇게 유명한 건축가가 나 같은 아줌마를 만나줄지 의문이 들었지만, 나야 손해 볼 것 없으니 시간 되면 한번 들르십사 했는데, 햇살 좋던 어느 봄날, 정말로 비행기를 타고 우리 집에 왔다! 나는 그동안 주장해온 것을 다시 한 번 설명했고, 덧붙인 것은 이것 하나. “나도 작품 활동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당신의 설계를 작품으로 존중합니다. 당신의 상상력을 마음껏 펼쳐보세요. 당신의 상상력이 실현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그는 감사하다며 자신 있게 웃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건축과가 공대에 속해 있지만, 나는 건축을 예술 영역으로 본다. 그러기 때문에 건축은 무엇보다도 열린 생각, 남과는 다른 독특한 발상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건축물은 제각각 다른 사람이 사는 공간인데, 사람을 이해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예술의 힘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우리나라에도 얼마든지 훌륭한 건축가가 있는데, 왜 하필 일본 건축가에게 설계를 맡겼느냐며 나의 사상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한다. 그가 일본 건축가여서 맡긴 것이 아니다. 내가 만난 수많은 건축업자처럼 내얘기를 듣고 나를 정신 나간 사람 취급하지 않고, “할 수 있다.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한 사람은 나카에 유지 씨뿐이었기 때문에 맡긴 것이다. 집을 짓기 전에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내 집 내 땅에 어떻게 집을 짓든 말든 무슨 상관?’이 아니라 ‘내 집 내 땅이라도 동네는 우리 모두의 동네’라는 것을 말이다. 사유재로 단정 짓지 말고, 집은 지은 사람이 오며 가며 보는 거니까 공공재로 생각하고 짓는다면?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지어놓은 집은 동네 미관을 해치게 된다. 게다가 단독 주택이 아닌 다세대 주택을 지으려고 계획한다면 한 가지 더 기억하면 좋겠다. 세입자는 월세나 전세를 빼먹는 도구가 아닌 나와 함께 살아갈 이웃이라는 사실을. 작은 공간에 살아야 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동 주택, 소형 주택일수록 건축가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나카에 유지 씨가 설계한 기찻길 옆 MM 아파트먼트와 NE아파트먼트.
집 짓기 본 게임
내게 맞는 건축가 찾기
음식에 비유해 설명하자면, 음식도 종류별로 전문 요리사가 있다. 건축가를 고르는 일도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특히 잘하는 집을 찾아가는 것과 같다. 일식집에 가서 중국 음식을 주문해봐야 제대로 된 음식이 나올 리 없고, 한식집에 가서 스파게 티를 주문하면 안 되는 것과 비슷하다. 건축도 여러 분야가 있 다. 공공 건축을 주로 하는 건축가가 있는가 하면, 주택을 주로 하는 건축가가 있다. 영역을 넘나들며 설계를 하는 경우도 많지만, 건축가에게도 주종목이 있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소형 주택을 지을 계획이라면, 소형 주택을 주로 설계한 건축가를 찾는 것이 좋다. 특히 소형 주택을 설계하는 것은 주거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주거가 목적이 아닌 공공 건물이나 기타 건축물을 설계하는 것과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하는 ‘집’은 그들의 움직임을 예상해야 할 뿐만 아니라 사람의 일상을 깊이 고민하고 삶의 변화까지 예측할 수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건축가를 찾을 때는 먼저 유명한 건축가가 아니라, 잘 소통할 수 있는 건축가, 나와 내 가족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고민할 수 있는 건축가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나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분명한 건축가라야 공간에 대한 해법도 잘 찾아낼 거라 생각한다. 남들에게 작품으로 보이거나 자신의 포트폴리오로 쓸 가상 공간을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람’에 초점을 맞추어 설계할 때 비로소 집은 제 기능을 온전히 하면서도 건축가의 작품으로도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으로 굳게 믿는다.
* 자료출처 - 행복이가득한 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