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황진이

천국의하루 2011. 1. 29. 21:08

누구나 황진이를 말하지만 황진이를 제대로 알고 있는 이는 드물다. 그런 황진이의 진면목을 살피기 위해서는 몇 가지 작업이 불가피하다. 첫째는 황진이가 살다갔다고 추정되는 16세기 초, 중반의 조선사회 속에서 그녀의 삶을 살피는 일이다. 황진이는 정사 어디에서도 그 기록을 찾을 수 없는 인물이므로 생몰 연대를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어우야담>등의 몇 가지 기록에 의하면 16세기 초반에 태어나, 중종, 인종, 명종 조를 두루 살다간 여인으로 보인다. 16세기 조선사회는 신분제의 제약과 남녀의 차별이 엄연한 시기였다. <송도인물지>와 <성옹지소록>의 기록에 의지해 볼 때 황진이는 황진사와 맹인 악사 현금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신분은 모계를 따르는 종모법이 원칙이었던 당시로서는 진이의 아버지가 진사라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녀는 천민인 악기의 딸로 태어났으니 자신도 천님인 기녀의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미천한 신분과 여인이라는 성적굴레'가 그녀의 삶에 비극적 원형을 만들어 놓았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삶에는 언제나 크고 작은 복병이 도사리고 있다. 그 난관에 맞서 싸우느냐, 순응하느냐로 한 인간은 삶의 주인이 되는냐 더부살이 인생이 되느냐로 갈린다. 황진이는 주인된 삶을 살기 위해 시대에 반기를 들었던 인물이다. 반기를 드는 과정에서 보였던 파격적 행동은 편견과 만나 '성적으로 문란하고 음탕한, 남자나 밝히는 약간 재주 있는 기생'이라는 평가 속에 묶여 버렸던 것이다.

둘째, 황진이가 남겼던 문학작품들을 꼼꼼히 검토하는 일이다. 문집에서는 황진이가 남기고 간 작품 중 시조 여섯 수와 한시 일곱 수를 전하고 있다. 한시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황진이의 시한 수가 김시습의 시 열 수와 비길 만하다"는 평가를 주저없이 내놓는다. 지면의 한계상 그녀의 시조들과 한시들에 대한 세세한 언급을 피한다. 다만 밝혀 두고 싶은 것은 '헛된 삶은 값진 문학작품을 선물로 준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녀가 '천기를 누설할 시인으로서의 권리'를 부여받고 그에 상응하는 작품을 내놓았다면 그 이면에 담긴 그녀의 삶이 매우 진지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셋째는 그녀와 교유했던 인물들에 대한 당대적, 혹은 현세적 평가를 살피는 일이다.'벗을 보면 그 인간의 면면을 알 수 있다' 는 것이 동서고금을 뛰어넘는 진리이고 보면 황진이의 벗을 통해 황진이의 진면목을 살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와 한달을 동숙했다고 알려진 소세양은 당대의 내로라하는 시객이었으며, 육 년의 세월을 함께했다고 알려진 선전관 이사종은 조용필이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뺨맞고 돌아섰을 대단한 가객이었다. 황진이는 이들과의 자유로운 교유를 통해 문학과 예술의 경지를 끝없이 탐닉했을 것이다. 지족암을 삼십년간 지켰다던 지족선사는 어떠한가. 그는 '면벽수행과 중생제도라는 두 가지 화두 속에 존재하는 간극을 어떻게 메워갈 것인가'를 고민했던 진정한 불제자였다. 황진이와의 만남이 이상 속에 머물고자 했던 한 인간으로 하여금 현실에 눈 돌릴 계기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평생을 스승으로 모시며 끝까지 그 덕을 흠모했다던 화담 서경덕은 남명 조식과 함께 16세기 학파의 양대 산맥을 형성했던 인물이다. 중종 조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축출된 이후 정계에 등 돌린 곧은 선비였으며, 유교, 불교, 도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진정한 학문의 성취를 위해 평생을 바쳤던 인물이다. 그의 덕을 흠모해 황진이는 기꺼이 서경덕을 스승으로 모셨을 것이고, 화담 또한 황진이를 제자로서 아꼈을 것으로 보인다. 스승의 무릎아래서 황진이는 '인간의 길' 에 대한 진지한 사색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며, 경세의 뜻을 둔 선비들을 지원하는 일 또 한 게을리 하지 않았으리라 보인다.

이와 같은 근거들로 미루어 볼 때 황진이는 천한 신분적 굴레를 천형으로 가진 여인의 몸이었으나 당대를 대표할 만한 시인으로, 음악을 사랑했던 예술가로 또한 시대적 고통을 함께 나눴던 인재들을 아낀 후원자로 살았던 인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드라는 다음과 같은 점을 말하고자 한다. 첫째, 이 드라마는 여성과 신분의 차별이 엄연했던 시대, 그 편견을 당연시 하지 않고 끊임없이 반기를 들었던 여성 황진이의 삶을 살피는 과정에서 점점 수동화 되어가는 사회, 자아상실의 시대를 뚫고 나갈 새로운 해법을 찾고자 한다.

둘째, 이 드라마는 여자들의 이야기다. 성의 차이가 차별이 되는 세상을 힘겹게 살아간 여자들. 그러나 또한 남자들의 이야기다. 차별이 아니라 사랑을 꿈꾸었던 그런 남자들 말이다.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세상이 지시한 길이 틀렸으면 반기도 한 번 들어볼 만 하다. 크게 외쳐도 좋다. 차별하는 이나 차별받는 이나 자유롭지 못하기는 매 한가지라고, 조화가 가장 아름답다고, 그리하여 조화는 차이는 인정하되 그를 차별하지 않는 열린 구조를 살고자 하는 열망이라는 얘기를, 남자와 여자는 인간이라는 데서 같다는 얘길 해보자.

셋째, 교방을 중심으로 살아간 황진이를 비롯한 기녀들은 시서화와 음률은 물론 나아가 춤에 능통한 종합 엔터테이너였다. 그녀들이 펼쳐내는 다양한 예술행위들을 통해 우리 문화의 향기를 느껴볼 기회를 제공한다.

넷째, 사랑의 가치에 대한 재확인을 통한 '진정한 인간의 길'을 탐구한다. 허태휘(화담의 제자로서 황진이와는 동문수학한 벗이자 허균의 아버지이기도 하다)가 물었다. "당신의 삶은 무엇이었는가" 황진이는 대답했다. "인간의 길을 알고자 했노라." 황진이가 녹녹치 않은 삶의 격랑을 건너며 끝까지 잡고 있었던 화두는 사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평등이 전제된 사랑은 복종을 외피로 갖는 다 해도 선택된 복종이므로 자유의 다른 이름이다. 황진이는 끝없이 '자유로운 사랑'을 꿈꾸었던 인물이다. 한 인간과의 사랑을 이루고 그 사랑의 실패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예술적 성취와 학문적 경지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으리라 보이며 그 끝에 참된 '인간의 길'이 놓여 있었으리라는 것은 무리 없게 짐작할 수 있다. 사랑이란 말이 빛을 잃고, 지고지순이라는 수식어를 들으면 소름이 돋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지만 사랑만큼 삶의 커다란 해답을 준비하고 있는 정서도 없다고 믿는다.

'사랑할 자유'를 위해 끊임없이 싸웠고 고통 받았으며, 잠시 사랑을 얻어 지리한 장마 끝에 보이는 푸른 하는를 보듯 삶의 희열을 맛보았을 황진이. 오늘 그녀의 삶과 만나 '사랑의 길' 나아가 '진정한 인간의 길'을 보고자 한다.

 

누구나 황진이를 말하지만 황진이를 제대로 알고 있는 이는 드물다. 그런 황진이의 진면목을 살피기 위해서는 몇 가지 작업이 불가피하다. 첫째는 황진이가 살다갔다고 추정되는 16세기 초, 중반의 조선사회 속에서 그녀의 삶을 살피는 일이다. 황진이는 정사 어디에서도 그 기록을 찾을 수 없는 인물이므로 생몰 연대를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어우야담>등의 몇 가지 기록에 의하면 16세기 초반에 태어나, 중종, 인종, 명종 조를 두루 살다간 여인으로 보인다. 16세기 조선사회는 신분제의 제약과 남녀의 차별이 엄연한 시기였다. <송도인물지>와 <성옹지소록>의 기록에 의지해 볼 때 황진이는 황진사와 맹인 악사 현금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신분은 모계를 따르는 종모법이 원칙이었던 당시로서는 진이의 아버지가 진사라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녀는 천민인 악기의 딸로 태어났으니 자신도 천님인 기녀의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미천한 신분과 여인이라는 성적굴레'가 그녀의 삶에 비극적 원형을 만들어 놓았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삶에는 언제나 크고 작은 복병이 도사리고 있다. 그 난관에 맞서 싸우느냐, 순응하느냐로 한 인간은 삶의 주인이 되는냐 더부살이 인생이 되느냐로 갈린다. 황진이는 주인된 삶을 살기 위해 시대에 반기를 들었던 인물이다. 반기를 드는 과정에서 보였던 파격적 행동은 편견과 만나 '성적으로 문란하고 음탕한, 남자나 밝히는 약간 재주 있는 기생'이라는 평가 속에 묶여 버렸던 것이다.

둘째, 황진이가 남겼던 문학작품들을 꼼꼼히 검토하는 일이다. 문집에서는 황진이가 남기고 간 작품 중 시조 여섯 수와 한시 일곱 수를 전하고 있다. 한시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황진이의 시한 수가 김시습의 시 열 수와 비길 만하다"는 평가를 주저없이 내놓는다. 지면의 한계상 그녀의 시조들과 한시들에 대한 세세한 언급을 피한다. 다만 밝혀 두고 싶은 것은 '헛된 삶은 값진 문학작품을 선물로 준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녀가 '천기를 누설할 시인으로서의 권리'를 부여받고 그에 상응하는 작품을 내놓았다면 그 이면에 담긴 그녀의 삶이 매우 진지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셋째는 그녀와 교유했던 인물들에 대한 당대적, 혹은 현세적 평가를 살피는 일이다.'벗을 보면 그 인간의 면면을 알 수 있다' 는 것이 동서고금을 뛰어넘는 진리이고 보면 황진이의 벗을 통해 황진이의 진면목을 살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와 한달을 동숙했다고 알려진 소세양은 당대의 내로라하는 시객이었으며, 육 년의 세월을 함께했다고 알려진 선전관 이사종은 조용필이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뺨맞고 돌아섰을 대단한 가객이었다. 황진이는 이들과의 자유로운 교유를 통해 문학과 예술의 경지를 끝없이 탐닉했을 것이다. 지족암을 삼십년간 지켰다던 지족선사는 어떠한가. 그는 '면벽수행과 중생제도라는 두 가지 화두 속에 존재하는 간극을 어떻게 메워갈 것인가'를 고민했던 진정한 불제자였다. 황진이와의 만남이 이상 속에 머물고자 했던 한 인간으로 하여금 현실에 눈 돌릴 계기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평생을 스승으로 모시며 끝까지 그 덕을 흠모했다던 화담 서경덕은 남명 조식과 함께 16세기 학파의 양대 산맥을 형성했던 인물이다. 중종 조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축출된 이후 정계에 등 돌린 곧은 선비였으며, 유교, 불교, 도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진정한 학문의 성취를 위해 평생을 바쳤던 인물이다. 그의 덕을 흠모해 황진이는 기꺼이 서경덕을 스승으로 모셨을 것이고, 화담 또한 황진이를 제자로서 아꼈을 것으로 보인다. 스승의 무릎아래서 황진이는 '인간의 길' 에 대한 진지한 사색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며, 경세의 뜻을 둔 선비들을 지원하는 일 또 한 게을리 하지 않았으리라 보인다

누구나 황진이를 말하지만 황진이를 제대로 알고 있는 이는 드물다. 그런 황진이의 진면목을 살피기 위해서는 몇 가지 작업이 불가피하다. 첫째는 황진이가 살다갔다고 추정되는 16세기 초, 중반의 조선사회 속에서 그녀의 삶을 살피는 일이다. 황진이는 정사 어디에서도 그 기록을 찾을 수 없는 인물이므로 생몰 연대를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어우야담>등의 몇 가지 기록에 의하면 16세기 초반에 태어나, 중종, 인종, 명종 조를 두루 살다간 여인으로 보인다. 16세기 조선사회는 신분제의 제약과 남녀의 차별이 엄연한 시기였다. <송도인물지>와 <성옹지소록>의 기록에 의지해 볼 때 황진이는 황진사와 맹인 악사 현금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신분은 모계를 따르는 종모법이 원칙이었던 당시로서는 진이의 아버지가 진사라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녀는 천민인 악기의 딸로 태어났으니 자신도 천님인 기녀의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미천한 신분과 여인이라는 성적굴레'가 그녀의 삶에 비극적 원형을 만들어 놓았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삶에는 언제나 크고 작은 복병이 도사리고 있다. 그 난관에 맞서 싸우느냐, 순응하느냐로 한 인간은 삶의 주인이 되는냐 더부살이 인생이 되느냐로 갈린다. 황진이는 주인된 삶을 살기 위해 시대에 반기를 들었던 인물이다. 반기를 드는 과정에서 보였던 파격적 행동은 편견과 만나 '성적으로 문란하고 음탕한, 남자나 밝히는 약간 재주 있는 기생'이라는 평가 속에 묶여 버렸던 것이다.

둘째, 황진이가 남겼던 문학작품들을 꼼꼼히 검토하는 일이다. 문집에서는 황진이가 남기고 간 작품 중 시조 여섯 수와 한시 일곱 수를 전하고 있다. 한시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황진이의 시한 수가 김시습의 시 열 수와 비길 만하다"는 평가를 주저없이 내놓는다. 지면의 한계상 그녀의 시조들과 한시들에 대한 세세한 언급을 피한다. 다만 밝혀 두고 싶은 것은 '헛된 삶은 값진 문학작품을 선물로 준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녀가 '천기를 누설할 시인으로서의 권리'를 부여받고 그에 상응하는 작품을 내놓았다면 그 이면에 담긴 그녀의 삶이 매우 진지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셋째는 그녀와 교유했던 인물들에 대한 당대적, 혹은 현세적 평가를 살피는 일이다.'벗을 보면 그 인간의 면면을 알 수 있다' 는 것이 동서고금을 뛰어넘는 진리이고 보면 황진이의 벗을 통해 황진이의 진면목을 살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와 한달을 동숙했다고 알려진 소세양은 당대의 내로라하는 시객이었으며, 육 년의 세월을 함께했다고 알려진 선전관 이사종은 조용필이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뺨맞고 돌아섰을 대단한 가객이었다. 황진이는 이들과의 자유로운 교유를 통해 문학과 예술의 경지를 끝없이 탐닉했을 것이다. 지족암을 삼십년간 지켰다던 지족선사는 어떠한가. 그는 '면벽수행과 중생제도라는 두 가지 화두 속에 존재하는 간극을 어떻게 메워갈 것인가'를 고민했던 진정한 불제자였다. 황진이와의 만남이 이상 속에 머물고자 했던 한 인간으로 하여금 현실에 눈 돌릴 계기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평생을 스승으로 모시며 끝까지 그 덕을 흠모했다던 화담 서경덕은 남명 조식과 함께 16세기 학파의 양대 산맥을 형성했던 인물이다. 중종 조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축출된 이후 정계에 등 돌린 곧은 선비였으며, 유교, 불교, 도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진정한 학문의 성취를 위해 평생을 바쳤던 인물이다. 그의 덕을 흠모해 황진이는 기꺼이 서경덕을 스승으로 모셨을 것이고, 화담 또한 황진이를 제자로서 아꼈을 것으로 보인다. 스승의 무릎아래서 황진이는 '인간의 길' 에 대한 진지한 사색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며, 경세의 뜻을 둔 선비들을 지원하는 일 또 한 게을리 하지 않았으리라 보인다.

이와 같은 근거들로 미루어 볼 때 황진이는 천한 신분적 굴레를 천형으로 가진 여인의 몸이었으나 당대를 대표할 만한 시인으로, 음악을 사랑했던 예술가로 또한 시대적 고통을 함께 나눴던 인재들을 아낀 후원자로 살았던 인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드라는 다음과 같은 점을 말하고자 한다. 첫째, 이 드라마는 여성과 신분의 차별이 엄연했던 시대, 그 편견을 당연시 하지 않고 끊임없이 반기를 들었던 여성 황진이의 삶을 살피는 과정에서 점점 수동화 되어가는 사회, 자아상실의 시대를 뚫고 나갈 새로운 해법을 찾고자 한다.

둘째, 이 드라마는 여자들의 이야기다. 성의 차이가 차별이 되는 세상을 힘겹게 살아간 여자들. 그러나 또한 남자들의 이야기다. 차별이 아니라 사랑을 꿈꾸었던 그런 남자들 말이다.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세상이 지시한 길이 틀렸으면 반기도 한 번 들어볼 만 하다. 크게 외쳐도 좋다. 차별하는 이나 차별받는 이나 자유롭지 못하기는 매 한가지라고, 조화가 가장 아름답다고, 그리하여 조화는 차이는 인정하되 그를 차별하지 않는 열린 구조를 살고자 하는 열망이라는 얘기를, 남자와 여자는 인간이라는 데서 같다는 얘길 해보자.

셋째, 교방을 중심으로 살아간 황진이를 비롯한 기녀들은 시서화와 음률은 물론 나아가 춤에 능통한 종합 엔터테이너였다. 그녀들이 펼쳐내는 다양한 예술행위들을 통해 우리 문화의 향기를 느껴볼 기회를 제공한다.

넷째, 사랑의 가치에 대한 재확인을 통한 '진정한 인간의 길'을 탐구한다. 허태휘(화담의 제자로서 황진이와는 동문수학한 벗이자 허균의 아버지이기도 하다)가 물었다. "당신의 삶은 무엇이었는가" 황진이는 대답했다. "인간의 길을 알고자 했노라." 황진이가 녹녹치 않은 삶의 격랑을 건너며 끝까지 잡고 있었던 화두는 사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평등이 전제된 사랑은 복종을 외피로 갖는 다 해도 선택된 복종이므로 자유의 다른 이름이다. 황진이는 끝없이 '자유로운 사랑'을 꿈꾸었던 인물이다. 한 인간과의 사랑을 이루고 그 사랑의 실패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예술적 성취와 학문적 경지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으리라 보이며 그 끝에 참된 '인간의 길'이 놓여 있었으리라는 것은 무리 없게 짐작할 수 있다. 사랑이란 말이 빛을 잃고, 지고지순이라는 수식어를 들으면 소름이 돋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지만 사랑만큼 삶의 커다란 해답을 준비하고 있는 정서도 없다고 믿는다.

'사랑할 자유'를 위해 끊임없이 싸웠고 고통 받았으며, 잠시 사랑을 얻어 지리한 장마 끝에 보이는 푸른 하는를 보듯 삶의 희열을 맛보았을 황진이. 오늘 그녀의 삶과 만나 '사랑의 길' 나아가 '진정한 인간의 길'을 보고자 한다.

 

이와 같은 근거들로 미루어 볼 때 황진이는 천한 신분적 굴레를 천형으로 가진 여인의 몸이었으나 당대를 대표할 만한 시인으로, 음악을 사랑했던 예술가로 또한 시대적 고통을 함께 나눴던 인재들을 아낀 후원자로 살았던 인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드라는 다음과 같은 점을 말하고자 한다. 첫째, 이 드라마는 여성과 신분의 차별이 엄연했던 시대, 그 편견을 당연시 하지 않고 끊임없이 반기를 들었던 여성 황진이의 삶을 살피는 과정에서 점점 수동화 되어가는 사회, 자아상실의 시대를 뚫고 나갈 새로운 해법을 찾고자 한다.

둘째, 이 드라마는 여자들의 이야기다. 성의 차이가 차별이 되는 세상을 힘겹게 살아간 여자들. 그러나 또한 남자들의 이야기다. 차별이 아니라 사랑을 꿈꾸었던 그런 남자들 말이다.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세상이 지시한 길이 틀렸으면 반기도 한 번 들어볼 만 하다. 크게 외쳐도 좋다. 차별하는 이나 차별받는 이나 자유롭지 못하기는 매 한가지라고, 조화가 가장 아름답다고, 그리하여 조화는 차이는 인정하되 그를 차별하지 않는 열린 구조를 살고자 하는 열망이라는 얘기를, 남자와 여자는 인간이라는 데서 같다는 얘길 해보자.

셋째, 교방을 중심으로 살아간 황진이를 비롯한 기녀들은 시서화와 음률은 물론 나아가 춤에 능통한 종합 엔터테이너였다. 그녀들이 펼쳐내는 다양한 예술행위들을 통해 우리 문화의 향기를 느껴볼 기회를 제공한다.

넷째, 사랑의 가치에 대한 재확인을 통한 '진정한 인간의 길'을 탐구한다. 허태휘(화담의 제자로서 황진이와는 동문수학한 벗이자 허균의 아버지이기도 하다)가 물었다. "당신의 삶은 무엇이었는가" 황진이는 대답했다. "인간의 길을 알고자 했노라." 황진이가 녹녹치 않은 삶의 격랑을 건너며 끝까지 잡고 있었던 화두는 사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평등이 전제된 사랑은 복종을 외피로 갖는 다 해도 선택된 복종이므로 자유의 다른 이름이다. 황진이는 끝없이 '자유로운 사랑'을 꿈꾸었던 인물이다. 한 인간과의 사랑을 이루고 그 사랑의 실패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예술적 성취와 학문적 경지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으리라 보이며 그 끝에 참된 '인간의 길'이 놓여 있었으리라는 것은 무리 없게 짐작할 수 있다. 사랑이란 말이 빛을 잃고, 지고지순이라는 수식어를 들으면 소름이 돋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지만 사랑만큼 삶의 커다란 해답을 준비하고 있는 정서도 없다고 믿는다.

'사랑할 자유'를 위해 끊임없이 싸웠고 고통 받았으며, 잠시 사랑을 얻어 지리한 장마 끝에 보이는 푸른 하는를 보듯 삶의 희열을 맛보았을 황진이. 오늘 그녀의 삶과 만나 '사랑의 길' 나아가 '진정한 인간의 길'을 보고자 한다.